어린 시절 동네 만화가게에 가서 5원을 주면 TV를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순위를 보면 김일 선수가 나오는 프로레슬링, 아톰과 요괴인간이 나오는 만화영화, 그리고 세 번째가 제5전선이라는 미드(미국 드라마)였다. 특히 제5전선은 오프닝 음악이 매우 특이해서 아직까지도 기억을 하고 있는데, 최근 톰 크루즈가 주연을 해서 대 히트한 영화 “미션 임파시블”에서도 같은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재현됨으로써 과거 제5전선이라는 미드가 바로 미 CIA 요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이었음과 제5전선이라는 제목은 바로 “미션 임파시블”이 원 제목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정보가 곧 국력이 되는 이 시대에 세계 각국은 모두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미국의 CIA, 영국의 MI6, 이스라엘의 모사드, 소련의 KGB 등은 워낙 유명하고, 우리 역시 1961년 CIA를 본따서 중앙정보부(KCIA)를 창설하였고, 이후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현재는 국가정보원이라는 명칭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스파이들이 주역이 되는 007시리즈나 “미션 임파시블”같은 영화의 도입 부분에서는 한결같이 요원들에게 임무를 하달하는 과정에서 “본 명령서는 10초 후 자동으로 삭제되며, 만일 귀하가 체포되거나 사망 시 국가는 그 어떤 사항도 부인할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멘트로 끝을 맺고 있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정보기관 요원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숙명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가정보원 본부 앞마당에 서있는 표지석의 표어 역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정보는 국력이다”를 거쳐 현재는 “자유와 진리를 위한 무명의 헌신”이라고 하여 국가정보원 소속 요원들은 늘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자 숙명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과거 미국 CIA가 니카라과 반군 지원 등 비도덕적인 일에도 연관되어 있으며, “본” 시리즈 영화에서와 같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요원들을 음모에 빠뜨리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상상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영화에서도 중요한 흐름은 결코 자기 자신이 CIA에 근무한다는 것을 드러내거나 조직의 비밀을 외부로 누설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김만복 씨가 출간한 자서전이 문제가 되고 있다. 김 씨는 “노무현의 평화구상”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통해 남북 정상간 핫라인이 개설되어 백라인(back line: 비선 조직)이 필요 없었다는 것, 6.15 공동선언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김정일의 언급 등 자칫 미묘한 부분을 넘어서 국가 기밀에 속할 수도 있는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김 씨는 과거 2007년 아프카니스탄 탈레반에 의한 분당 샘물교회 신도 납치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선글라스를 낀 채 나타남으로 해서 그 자질을 의심받더니, 얼마 전에는 친북 좌파성향의 일본 시사 월간지인 “세카이(世界)”에 기고한 글에서 연평도 피격사건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만든 작품이라는 등 일국의 정보수장 출신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망언을 늘어놓기도 한 사람이다.
이 사건으로 국가정보원은 김씨를 국가정보원법 위반으로 고발을 할 것으로 보이지만, 사법처리 이전에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최고 수장이었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 씨가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한 이유가 국회의원 출마를 하기 위함이라는 보도가 있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 씨의 행위는 과거 5공 정부의 핵심이었으며,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씨와 비교가 된다.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이종찬 씨는 대권까지도 바라볼 정치적인 꿈도 남아 있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으로 초대 국정원장에 취임하면서 스스로 정치인의 길을 포기한다고 하였다. 이종찬 전 원장은 대통령의 꿈도 버릴 정도로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 자리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김 씨의 행위는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 자리를 단지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한 자리로 전락시켰으니 국정원을 정권의 눈치나 보고, 줄이나 대려고 하고, 간첩하나 잡지 못하는 일개 공무원 조직으로 전락시킨 원인이 아닌가 한다.
지금이라도 “자유와 진리를 위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국정원의 가치에 맞게 국정원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 톰 크루즈나 제임스 본드와 같은 멋진 활약을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