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2일 새벽 대한민국 제 14대 대통령을 역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고인께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이자, 대통령 재임 시절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척결⌟, ⌜역사 바로 세우기⌟ 등등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신 분이었으나 불행이도 재임 말기 IMF 외환위기를 막지 못한 이유로 지금까지 올바른 평가와 존경을 받지 못한 불행한 분이기도 하다.
고인께서는 자유당 시절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불과 26세 약관의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 후 9선 의원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신 분이다.
또한 유신 시절 국회의원직에서 제명 을 당할 때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든지 ,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과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 공화당과 3당 합당 당시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라는 숱한 어록을 남기셨다.
필자가 고인을 처음 뵌 것은 지난 1992년 10월 경 당시 고인께서 민자당 대통령 후보 시절이었다. 당시 필자는 지인의 소개로 대선 사조직인 “나라사랑 실천운동 본부(약칭 나사본) 청년학생 사업단”의 조직 본부장을 맡아 전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거운동을 할 때이었다. 고인께서는 전국 대학생 대표들과 사업단 주요 간부들을 상도동 사저로 초대하여 격려를 해 주셨는데, 당시 고인께서 “청년의 힘! 나라의 미래!”라는 휘호를 써 주셨지만 안타깝게도 필자는 그 휘호를 보관하지 못하고 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98년 어느 날, 당시 필자가 대학 은사님이신 성균관대학교 총장 출신 장을병 의원님의 입법보좌관으로 근무 중 장의원님과 상도동 자택을 방문하였다. 반갑게 맞아주신 고인께서는 청와대에서 나오신 후 동네 주민들과 배드민턴을 즐기신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그런지 70이 훨씬 넘으셔서 백발이시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동안은 변함이 없으셨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절친한 동지이였던 두 분의 대화는 여전히 나라 일을 걱정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고자 하였을 때 고인께서 적극 반대하셨다는 애기, 하나회 척결 당시 혹시 모를 군부의 반발을 걱정하였다는 애기가 기억난다. 또한 북핵 위기 해결과 남북 긴장완화를 위해 김일성 주석과 남북정상회담을 추진 중 김주석의 사망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한 점을 매우 아쉬워 하셨던 것도 기억난다.
역사에 나타난 모든 위인들에게는 공과가 존재한다. 이승만 대통령도 훌륭한 독립운동가였지만 대통령 재임 시절 독재로 인해 제대로된 평가를 못 받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이 땅에 가난을 몰아낸 위대한 업적과 함께 5.16 쿠데타와 유신이라는 망령이 함께 존재한다. 천지간에는 음과 양이 함께 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과 과가 함께 존재한다. 그래서 역사는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면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이자 각종 개혁정책을 시행하신 분이다. 그러나 재임 말기 외환위기를 불러온 과도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고인의 가장 큰 업적은 그 분의 호가 거산( 큰 산)답게 그 그늘에서 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을 키워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13대 총선을 통해 고인께서 발굴해낸 인재이다. 이 외에도 이회창 총재, 이인제 대표, 손학규 전 대표 등 대통령 후보군을 비롯해서 서청원 대표, 김무성 대표, 원유철 대표, 정병국 장관 등등 여전히 정치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분들이 모두 고인께서 발굴하고 키워낸 인재들이다.
과거 위대한 제왕이 되기 위해서는 걸맞는 인재를 등용하였듯이 무릇 훌륭한 정치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훌률한 인재들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고인께서는 위대한 정치지도자라 불리울만 하다.
삼가 거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