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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카에게 도시락 폭탄 이야기를 들려주며

관리자 기자  2016.04.27 15: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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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이 사람이 도시락에 폭탄 넣고 나쁜 사람 해치운거지? 맞지?”  “그래 맞아, 이 분이 매헌 윤봉길 의사야” 
나는 조카바보다. “이모가 제일 좋아”하는 조카가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겠나. 조카가 생긴 뒤로 자매의 우애도 깊어졌다. 조카바보가 된 나는 주말이면 없는 시간을 쪼개 조카와 함께 하는데 그렇다고 명품 옷이나 비싼 장난감을 선물하는 소위 골드앤트는 아니다. 대신 나는 조카에게 지적 호기심을 선물한다.
따뜻한 바람이 제법 불어오고 사방에 꽃도 피고, 소풍가기 딱 좋은 주말, 조카를 데리고 양재 시민의 숲을 찾았다. 목적지는 양재 시민의 숲에 자리 잡은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예비역 대위인데다가 제대군인지원센터에서 일을 하기 때문인지 나는 국가보훈처 행사에 관심이 많은데, 오는 4월29일에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84주년 기념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의 지적호기심을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이야기로 채워주고자 나들이 장소를 이곳으로 정했다. 
나들이 전날, 조카에게 들려줄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니 어린 시절 어머니께 들었던 도시락 폭탄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화끈, 밀려드는 부끄러움을 밀어두고 윤봉길 의사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매헌 윤봉길. 본명은 우의(禹儀), 매헌은 호. 친근한 어감의 ‘봉길’은 그의 별명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932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 매헌은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아프고 암울한 시대를 산 행동하는 젊은 지식인이었다. ‘무식’, 배우지 못한 것이 나라를 잃게 한 원흉이라고 생각한 그는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고 19세에 야학당을 개설해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가족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마침내 중국에서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뜻을 펼치게 된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 일왕의 생일축하 행사장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총사령관 등을 즉사시키는 의거를 감행하고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되었다. 
그의 쾌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동양의 작은 땅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불굴의 독립의지와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가던 독립운동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특히 중국군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병도 불가능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탄복했고, 그의 의거로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후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에 다소 침체되었던 독립운동계에 활력이 보충되고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한반도의 역사를 돌아볼 때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사 이래 가장 풍요롭고, 평화롭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내가 누리는 풍요로움과 평화가 그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역사를 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다. 
조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희생과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일제강점기를 끝낼 수 있었고, 이어진 민족의 비극 6ㆍ25 또한 민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헌신한 군인, 제대군인 있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카가 오늘을 계기로 윤봉길 의사를 기억하고, 나아가 조카의 작은 심장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