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기 성 (서울시의회 의장)
미리 알고 보면 전과 다르다고 했던가. 창덕궁 쉬는 어느 날 내가 고문으로 있는 동아리 회원들이 여유있게 창덕궁 일대를 답사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왔다.
궁궐건축전문가, 문화재청의 한 과장과 동아리회원, 서울문화유산해설사 30여명이 함께했고 학창시절 이후 40여 년만이다. 이번 답사에서 단연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낙선재(樂善齋)이다.
원래 낙선재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남동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는 헌종 13년(1847) 건립된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삼년상 기간 근신하며 거처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1917년 대조전이 불에 탔을 때에는 순종이 기거했고, 순종비인 순정황후와 조선시대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도 생활했다. 그리고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해 낙선재는 다섯 궁의 전각들 중 가장 최근까지 왕실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낙선재의 첫 느낌은 사치스러움을 경계했던 헌종의 품성을 그대로 반영해서인 듯 건물 어디에도 단청 한줄 긋지 않았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았고 단아함도 곳곳에 스며 있었다. 보통 이곳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왕국, 조선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던 씁쓸함과 동시에 나라 잃은 설움이 있는 곳으로만 우리는 기억하고 알아왔다.
물론 지난 시간 속에서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역사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너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측면만 알고 있지 낙선재 건축 이면에 숨어있는 헌종의 파격적인 행보와 경빈 김씨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등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왕실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사실 외국의 경우 없는 것도 만들어내고 그럴싸하게 포장해 문화브랜드를 만들지 않는가! 꼭 거창한 거시담론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헌종의 여인으로 기록된 경빈 김씨, 그녀에 대한 왕의 사랑은 절대적이었으며 그 절정으로 헌종의 사랑과 예술이 녹아 빚어진 것이 낙선재이다. 주인에 따라 각각의 성격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는데 낙선재는 헌종의 침전으로, 석복헌(錫福軒)은 경빈 김씨의 침전으로, 수강재(壽康齋)는 순원왕후의 침전으로 꾸며져 있다. 또 세 채의 건물 뒤에는 각각의 후원이 딸려 있는데 평원루(平遠樓), 한정당(閒靜堂), 취운정(翠雲亭)을 두었으며 곳곳에 둘만의 풋풋한 로맨스가 피어있다. 여인네들의 답답한 궁궐생활을 위한 헌종의 깊은 배려가 아닐까 싶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했다.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정원이다.
특히 벽에 새겨진 거북무늬와 음양의 합일을 상징하는 고리모양, 무한의 세계를 상징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의미를 담은 무늬 등은 영원한 사랑의 징표들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지천이다.
2시간의 짧은 답사를 통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인공을 가미하지 않은 자연의 색조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낙선재를 둘러보면서 우리나라 전통건축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지녀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전통문화는 오랜 시간 켜켜이 쌓아온 정신이자 역사의 산물이다.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도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문화의 위대함을 강조하신 만큼, 이는 한 나라의 정체성을 올곧게 세우기 위한 이정표(里程標)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전통문화의 보다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으면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및 독도 분쟁 등과 같은 난제들을 쉽게 돌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싶다.
오래되어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 보일지라도 한 나라의 문화척도이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이 전통문화이다.
사업자등록번호 : 107-81-58030 / 영등포방송 : 등록번호 : 서울아0053 /www.ybstv.net /발행처 : 주식회사 시사연합 / 발행인 겸 대표이사 김용숙
150-804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로 139 (당산동3가 387-1) 장한빌딩 4층 / 전화 02)2632-8151∼3 / 팩스 02)2632-7584 / 이메일 ydpnews@naver.com
영등포신문·영등포방송·월간 영등포포커스·(주)시사연합 / 본 사이트에 게재된 모든 기사는 (주)시사연합의 승인 없이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