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중국의 최고 권력자인 모택동이 죽자 우여곡절 끝에 등소평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등소평이 권력을 잡은 후 당면한 첫 번째 과제는 모택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었다. 이에 1981년 6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 11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수십차례 논의를 거쳐 나온 결론이 바로 “공칠과삼”이다. 즉 모택동의 혁명이념과 중국 건국에 대해서는 그 공이 70%이고, 문화혁명을 일으켜 홍위병을 동원하여 수많은 탄압과 숙청을 일으킨 죄를 30%라 평가한 것이다.
등소평의 생각은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혁명은 중국의 역사를 약 30년 이상 후퇴시킨 씻을 수 없는 잘못임에 분명하지만, 그를 독재자니 피의 숙청자니 하는 평가는 결국 중국의 국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니 만큼 나라의 장래를 봐서라도 지나친 격하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등소평은 문화대혁명 당시 자본주의 신봉자라는 이유로 실각하여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한 바 있다. 심지어 등소평의 아들은 부친의 잘못을 자아비판 하라는 홍위병들의 강압에 못 이겨 스스로 창문에서 뛰어내려 불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등소평이었지만 결코 모택동을 격하하거나 그의 업적을 폄훼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 중국인들이 말하기를 “모택동이 인민의 나라를 만들었고, 등소평이 인민을 부자로 만들었다”라 한다.
이에 반해 우리의 경우 해방이후 현재까지 11분의 전직 대통령을 배출하였지만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대통령이 단 한분도 없다. 그저 찢고 할퀴어 상처 투성이의 논란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논란은 친일파 논란, 5.16 쿠데타 논란, 경제발전 논란, 독재 논란 등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점의 중심이다. 지지하고 찬양하는 쪽에서 보면 5천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가난을 몰아내고 지금의 경제발전의 기틀을 세운 인물로 평가한다. 이에 반해 반대하는 쪽은 친일파이며,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라로 평가한다. 물론 두 방향의 평가가 다 일리가 있다. 18년의 긴 통치 기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족적은 우리 현대사의 영광이자 동시에 비극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한 신생 후진국들이 겪는 대부분의 공통된 정치현상은 군부 쿠데타였다. 민간 영역이 아직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부는 가장 진보적이고 현대적 가치와 기술을 동시에 갖춘 집단이었다. 따라서 군부 쿠데타는 선진 집단 군부가 후진 집단인 민간 영역을 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약 60개 나라 중에서 소위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는 유일하게 대한민국뿐 이었다. 이는 박정희라는 걸출한 리더십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수출주도형 산업 전략을 통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화학 공업 육성을 통한 자주국방 정책, 새마을 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대개혁 운동 등이 분단 70년이 지난 지금 남북간 경제격차를 역전을 넘어 무려 40배 차이로 벌려놓을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그 결과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앞당긴 결과를 가져왔다. 공자께서도 호구지책이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이 예의를 알 수 없다라 하였듯이 경제가 발전해야 민주주의도 발전 가능하다는 조셉 나이 교수의 분석이고 보면,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역으로 민주주의를 앞당긴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11월 14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우표발행이 취소되자 일반 시민들이 사비를 모금하여 발행하였다고 한다. 또한 상암동에 있는박정희 기념도서관에 건립하려했던 동상도 일부 시민단체들의 반대시위로 인해 연기되었다고 한다. 어떤 평가를 하던 국민 각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공칠과삼” 정도로 인정해줄 여유도 없는지 모르겠다.